흰나비의 방, 조현택의 카메라 옵스큐라
글 : 최연하 (전시기획자, 사진비평가)
조현택의 <빈 방>연작은 대립적인 두 세계의 상관관계 혹은 갈등관계를 사진의 본질을 따라가며 형상화한 작품이다. 어두운 방과 밝은 마당,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 옵스큐라(obscura)와 루시다(lucida), 정지와 흐름, 그리고 사라짐과 살아있음 등이 그 대립적인 두 가지 세계다. 어머니의 부재를 심각하게 앓던 작가는 작업을 재개할 수 없을 정도로 당장의 현실적 계기를 찾기가 무망한 지경에 놓이게 된다. 그러다 마치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을 놓아버린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La chambre claire)』(1980)를 집필하며 죽은 어머니를 초혼(招魂)하듯, 조현택은 <빈 방>연작을 통해 드디어 어머니와 조우하게 된다. 사진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게 된 것이다. <빈 방>을 찍은 이 사진들은 떠난 사람들의 부재를 전제로 향수와 그리움을 일으키며 사진의 고유성을 각인시키는데, 볼수록 쓸쓸하고 아름답다.
“뭔가가 있긴 있을 건데, 어두운 공간에 집중을 하는 거야. (…) 깜깜한 빈 방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 집에 살았던 귀신이나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벽을 사이에 두고 바깥은 지나가는 시간 그리고 살아있는 시간들이고 방안은 죽어 있는 시간처럼 멈춰버린 모습들 같은 것 말이야.(…)” 작가는 작업의 전 과정들을 상세하게 기록 했는데, 빈 방을 처음 발견하고 카메라 옵스큐라의 형식을 찾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조리개의 수치를 달리하거나 다중촬영을 통해 노출을 보강하는 등 원시의 사진가들처럼 이미지를 찾아가는 작가의 도정은 설렘과 탐구심,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포토그라피photography’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 사진발명가들의 이 ‘떠도는 이미지’를 향한 열망들처럼 말이다. 사진 발명의 초석을 다진 니엡스는 사진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자연 경관을 복사하는 것” 또는 “충실한 자연의 형상”이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발명가인 다게르는 조금 더 모호하게, “카메라 옵스큐라에 의해 반사된 자연의 영상을 자동 복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자연의 효과”, “자연의 완전한 형상”, “자연의 인상”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영국의 탈보트는 “자연 화학의 무한한 힘”에 의해 “영향 받고”, “흔적이 남겨진”, “그림”이자 “소묘”라고 말하며 “자연의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 인쇄할 수 있도록 종이 위에 정착시킬 방법”을 떠올리게 된다. 세 사람 모두 이 유령 같은 이미지를 ‘정착fixing’시키는 것이 화두였는데, 이는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 이미지를 찾아가는 조현택의 유랑에도 닿아있다. ‘뭔가가 있을 것 같은’, 이 ‘꿈’같은 이미지를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조현택의 <빈 방> 연작은 단순히 두 세 개의 레이어를 겹쳐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거대한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 형성된 이미지를 고정시킨 것이다. 라틴어로 카메라(camera)는 ‘방’을 뜻하고, 옵스큐라(obscura)는 ‘어둡다’라는 의미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에 작은 구멍으로 들어온 광선이 외부의 풍경을 거꾸로 비추는 것으로, 핀홀(pin-hole)카메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람보다 더 큰 형태여서 사람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문을 열고’ 들어가 벽면에 비친 이미지를 그렸다고 한다. 조현택은 바로 카메라의 시원(始原)으로 돌아가 어두운 방에 맺힌 바깥풍경을 ‘다시’ 찍었다. 즉, 카메라 옵스큐라 안의 또 다른 카메라가 놓인, 두 개의 카메라, 두 개의 세계가 만든 하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특이한 점은, 조현택의 사진에서 열렸다 닫히는 카메라의 셔터 속으로, 안과 밖, 어둠과 밝음, 죽음과 삶, 꿈과 깨어있음이 합치된다는 것이다. 셔터가 닫히자마자 곧장 과거로 화석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에 잊혀진 기억과 사라진 사람들이 들어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는 마술의 시간이 다시 열리는 것이다. “결국 내가 잡고 싶었던 것은 빈방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세상과 바깥의 내가 사는 세상의 조우 아니었을까. 그 조우의 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옵스큐라였고 어두운 방안에서 내가 느꼈던 엄마였고, 편안함이었고, 끈질기게 부여잡고 싶었던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과거현재미래가 통째로 춤을 추며 사진이 제 스스로 꿈꾸기 시작하는 이 아름다운 시간은 캄캄한 적막의 텅 빈 방에서 비로소 흐르기 시작했다. 작가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 작가의 방으로 날아 온 흰나비의 날갯짓처럼 <빈 방>의 풍경은 곳곳에서 생생하다.
그리하여 <빈 방>의 사진 속에는 바깥세상의 온갖 ‘있음’들이 드나드는데, 봄여름가을겨울 그 빛들은 제각각 이다. 봄에는 환한 연둣빛이 스며들고, 여름에는 청량한 푸른빛이 돌고, 가을에는 고동빛으로 물들다가, 겨울에는 맑고 차가운 빛이 오간다. 1996년에 멈춘 달력과 로마서의 한 구절과 불경의 글귀 위에도 그 빛들이 넘실거린다. 빛들은 남겨진 가재도구와 흐린 벽지와 구겨진 장판을 타고 흐르다가 흰나비처럼 하늘하늘 날라 가기도 한다. 유채꽃이 화사한 어느 봄날의 기억에서는 오랫동안 멈춰있기도 한다. 빈 방의 벽은 흐르는 시간과 빛들을 그림처럼 담아냈다. 빛나는 어원의 조합인 사진이라는 명칭처럼, 그 빛은 의미심장할 뿐이다. 그리스어의 두 어원이 결합한 ‘photo(빛)’과 ‘graphie(글쓰기, 소묘, 묘사)’는 한 단어 안에 두 개의 세계가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즉, 포토-그라피(photo-graphy)는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 저편과 이편의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 만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 사이’에 발생하는 실재를 주목해야 하고 ‘- 사이’의 맥락을 따져야 하며 왼쪽의 자연에서 오른쪽의 문화로 옮겨가는 생성의 지점들을 살펴야 한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그 사이에 사진이라는 사건이 탄생하기에, 그 찰나에 무한 생성중인 ‘어떤 것’을 조현택은 붙잡아야 했다. 조현택 사진의 존재 방식을 바로 그 ‘-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이유이다. 시간-풍경-공간을 한 이미지로 가능하게 만드는 실질적 주체인 그 ‘-사이’의 틈에서 발생하는 어떤 풍경들을 보게 하는 것. 어두운 방과 밝은 마당,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 옵스큐라와 루시다, 정지와 흐름, 그리고 사라짐과 살아있음 등의 대립각이 무너지며 서로에 대해 이접하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나눠지는 어떤 운동을 조현택은 열망한 것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로, 한 때 그 사람/사물이 “거기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그 사람/사물이 거기에 분명히 있었기에 사진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조현택의 <빈 방> 사진의 고유성이 획득되는 지점도 바로 (지금은 떠나고 없지만) 언젠가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지금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마당의 풍경을 끌어와 ‘함께’ 보여준다는데 있다. 자기 상처와 공생하며, 거기에 이르기까지 막막한 헤맴을 통해 자신의 사진세계를 좀 더 넓은 지평 속에 확장하려는 조현택의 사진적 고투가 <빈 방>에 이르러 미적 거리를 얻어낸 것도,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만, 상상력에 의한 열림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빈 방’을 담아낸 ‘어두운 방’이 결코 어둡지 않은 것은, 상실감의 내면화를 성숙시켜온 조현택 사진의 지속적 탐구가 선명한 자기표현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