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거울 속 술수의 극치(極致) - 조현택 사진예술의 미학

                                                                                                                김종길 | 미술평론가

그의 포트폴리오에 그 스스로 쓴 말 하나 : “한국사회 안에서 마주한 기이한 풍경을 탐미적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 말 속의 ‘기이한 풍경’이 식민과 전쟁과 독재에 서구화가 달라붙은 근대성과 압축적 고도성장 혹은 도시 바깥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탐미적 시선’은 불연기연(不然其然)으로 돌아가는 우물거울(pentaprism)일 수 있다. 불연기연은 1863년 수운(水雲)이 늘 바뀌어 돌아가는 눈앞의 자연과 하루하루 삶의 궁극적 실재를 묻는 물음이다. 수운은 “아아, 이 같은 헤아림이여, 그러한 이치로 보면 그렇고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이치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다(噫 如斯之忖度兮 由其然而看之 則其然如其然 探不然而思之 則不然于不然)”고 말했다.

불연기연의 우물거울은 늘 부조리한 현실을 뒤집어 그 너머의 그늘 그림자를 들춰낸다. 현실은 들끓어서 부조리하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아서 부조리하고, 겉은 그럴싸해도 속은 썩어 빠져서 부조리하다. 그의 눈은 그늘 그림자로 파고 든 우물거울이다.

우리 눈앞에 드러난 꼴짓(現象)의 껍데기는 서구가 들어 온 백년 정도의 시간일 터이나, 이 땅에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의 무늬는 수천 년이고 그 무늬를 이룬 마음 줏대는 헤아리기 힘들다. 헤아리기 힘든 그 마음의 참꼴(實像)이 보아도 보기 힘든 불연(不然:그렇지 않다)이라면, 드러난 꼴짓의 껍데기는 보기 싫어도 보이는 기연(其然:그렇다)일 것이다. 스스로 그렇지 않은 참꼴의 마음은 헤아리기 힘들고, 스스로 그렇게 드러난 꼴짓은 껍데기일 테니까.

들바람을 일으켜라!

그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2007-2009)의 작품에 들춰낸 것은 가파른 성장의 욕망이 활활 치솟는 도시의 가장자리, 아니 그 경계의 바깥을 살아가는 소년들에 관한 탈주의 몽타주다.

경계의 바깥을 도는 시간은 흘러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어떤 시각(時刻)과 시각(時刻)의 사이라 할 때 몽타주로 새긴 소년들의 시간은 시각 없는 ‘사이’다. 사이만 있는 시간은 성장이니, 욕망이니, 활활 따위를 갖지 않는다. 그 시간은 그저 낮게 흐를 뿐이고 저절로 될 뿐이며, 하루하루 오늘이 늘(常)을 타고 늘로 이어질 뿐이다. 그는 그 사이사이의 늘에 딴죽을 걸 듯 들바람(野望)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짓고 일으켜 세웠으니 그 들바람의 장면들은 그가 꿍꿍(想像)하며 연출한 것들이다. 예컨대 <자전거 폭주>는 폭주의 헛짓으로 집집 우주의 광야를 달리는 소년들이다. <출격>은 우격다짐으로 패거리 싸움질 준비를 흉내 내는 소년들이고, <아지트>는 몰려가서 이짓 저짓 꼴짓의 몸짓을 그려보면서 그 짓을 꾸며대는 소년들이다. 그 짓의 ‘딴짓걸기’가 꿍꿍의 탈주요, 탈주의 몽타주며 들바람이다.

늘이 일으키는 스스로 그러함의 사건들은 시간으로 보이지 않아서 불연이지만, 소년들이 일으키는 헛짓 꼴짓의 껍데기는 그렇게 시간으로 드러난 기연이다. 그 소년들의 ‘사이’를 불쑥 도시의 안쪽으로 밀어 넣어서 ‘전시’로 펼쳐내는 그의 사진들은 화들짝 시간을 놀래며 달아난다. 불연이 기연이요, 기연이 불연이 되는 순간이랄까!

들바람이 불지 않은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세계의 풍경은 늘 기이하다. 조현택의 우물거울은 바깥을 안으로 돌리는 눈이다.

안팎을 추는 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가 우물거울 속 사이를 타고 들어가서 들바람의 하고 싶음(欲望)을 소년들의 몽타주로 그린 ‘기이한 풍경’이라면, “빈방”(2014-2018)은 그야말로 빈방에 펼쳐놓은 방 바깥의 우물거울이다. 카메라옵스큐라(Cameraobscura)를 발전시킨 것이 카메라 속 펜타프리즘이기 때문이다.

전남 나주의 작업실 근처 옛 성벽이 복원되면서 성벽에 기대어 산 사람들이 집을 떠났다. 사람이 떠난 집들은 비어서 빈집이 되었고 빈집들은 사람이 없어서 죽었다. 죽은 빈집들은 철거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빈집을 찍어서 영정으로 남기고 싶었다. 빈집의 주검은 싸늘했다. 여기를 사는 집들과 달리 그 집들의 속은 아주 오래된 무늬여서 낯설었다.

그는 시간의 뒤로 물러나 ‘기이한 풍경’이 되어 버린 그 텅 빈 빈집에 따듯한 숨 하나를 틔우는 꿍꿍을 했다. 우물거울이 떠 오른 것이다. 작은 구멍 하나로 빈집은 우물거울이 될 수 있으리라!

나주시 금계동 57번지. 오래 묵은 빈방에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졌다. 순간 숨이 트여서 빈집이 살아 올랐다. 그는 그것을 찍었다. 살아 오른 숨의 풍경을 박았다. 바깥이 안으로 들어와 거꾸로 뒤집힌 풍경은 방에 남은 얼룩과 벽지와 누런 때와 흑백의 사진들과 어울리며 숨을 돌렸다.

부조리한 현실을 뒤집어 그 너머의 그늘 그림자를 들춰내는 그의 미학은 이 방에서 온전했다. 빈집이 그늘 그림자이고 그 속으로 현실이 뒤집혀서 걸렸으니 역설이지 않은가! 그림은 ‘그리다’, ‘그리워하다’의 말에서 왔으니 그림이란 늘 그리며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바깥이 안으로 들어와 풍경을 이룰 때 빈집은 숨을 터 살았으나, 사람이 깃들이지 않는 집은 살았어도 그리움일 것이다.

그는 “어둠에 익숙해지면 어둠 속이 보인다.”며 어둡고 차가운 북향집에서 마당의 눈부신 풍경이 빈방과 어울려 춤추는 모습을 보았다. 안팎이 열려서 추는 춤은 우물거울을 휘돌아 솟구치는 신명이리라. 이승저승이 얼빛(靈光)으로 타 번지는 감흥의 신명이리라!

환컴으로 번쩍이는 돌

창작샘터 스튜디오에 걸린 “스톤마켓”(2019- ) 작품은 나를 눌러서 넘어뜨릴 만했다. 처음 마주한 가로 600센티미터의 <스톤마켓_포천>은 30년 넘게 궁리(窮理)해 온 앎의 그물이 벼릿줄 당기듯 바싹 조이는 느낌이었다.

흘깃 스쳐간 눈 안으로 온갖 종교철학의 열쇳말 씨줄이 덩이를 달고 이어졌고, 그 씨줄 덩이가 현실을 깎아 세운 조형미학의 열쇳말 날줄이 주르륵 펼쳐졌다. 그의 사진도 사진이려니와, 그 사진 속 풍경이 우리 삶의 주변에 늘 있는 풍경이라는 데에 기이한 놀라움이 있었다. 그냥 스쳐 지나간 그 장면들이 회억(回憶)으로 되돌아오면서 그물코를 이루자 그 기이함은 놀라움이 아닌, 눈이 부실만큼 찬란한 환컴(恍惚)으로 번쩍였다.

그의 ‘탐미적 시선’은 “스톤마켓” 연작에서 어떤 절정에 달한 듯싶다. 사진 속 조각들은 대체로 높이 받들어 우러러 보는 추앙(推仰)의 것들이요, 기리어 부르는 찬미(讚美)의 대상이며, 오래 잊지 않고 마음에 두는 기념물(記念物)이기도 하고, 또 삿된 것을 막아주는 벽사(辟邪), 싯다르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塔), 우러러 믿는 숭배(崇拜), 불을 밝히는 석등(石燈), 스님의 사리를 넣어 둔 부도(浮屠), 무덤 앞에 세운 석조물(石造物: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동자석童子石·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상석床石·혼유석魂遊石·향로석香爐石·고석鼓石·제주병석祭酒甁石·배설석排設石·호석護石·호석虎石·양석羊石·마석馬石·차일석遮日石)이었다.

“스톤마켓”은 그러니 기독교․천주교․불교․도교․무교(巫敎)가 뒤석인 종교 만물상이요, 샤머니즘의 무지개이며, 애니미즘과 슈퍼울트라초현실이 똬리를 틀고 앉은 어떤 이상향의 도래지다. 어디 그뿐이랴. 그곳은 산사람의 하고픔(欲望)이 빚어낸 온갖 꼴(形像)은 물론, 산사람이 죽은 사람에 기대어 일으키려는 하고픔의 구슬픈 멜랑콜리가 기괴하면서도 섬뜩하게 또 우스꽝스럽게 나타난 곳이다.

그는 이 그로테스크의 한 장면을 얻기 위해 봄여름가을겨울의 넷 때를 헤아려 생각하고, 그 넷 때의 어느 하루와 그 날의 날씨와 시간과 어둠과 달과 거리를 따져서 일을 벌였다. 손 없는 날은 그에게 얼마나 귀한 날이었을까! 그렇게 일을 벌려 얻어낸 단 하나의 컷이 그의 작품이다. 그 컷은 그저 거기 있는 어떤 풍경이 아니다. 시간을 벼려서 시각(時刻)을 떼어내고 ‘사이’을 길어 올린 풍경이다.

우리는 시간이 완전히 멈춘 집집 우주의 한 사이를 보고 있다. 바로 그때, 바로 거기, 바로 그 풍경, 바로 그 낱낱의 전체가 어울리는 우물거울의 집집 우주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에, 웅천에, 익산에, 옥과에, 포천에 펼쳐진 그 놀라운 한 때의 우주는 한국 사람의 마음이 그리고 짓고 일으켜서 이룬 현실의 극치(極侈)다. 조현택은 그 극치를 예술로 일으켜 술수의 극치(極致)로 뒤바꾸었다.